말로 표현되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 때
추함이 생겨난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선을 선으로 알 때
악이 생겨난다.
그런 까닭으로
유와 무는 서로 의지해서 생기며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의지해서 완전해지며
길고 짧음은 서로 의지해서 대조되며
높고 낮음은 서로 의지해서 위치하며
음과 소리는 서로 의지해서 조화를 이루며
앞과 뒤는 서로 의지해서 사귄다.
따라서 현자는
행함이 없이 일을 처리하며
말이 없이 가르침을 행한다.
모든 것이 스스로 일어나지만
그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는 만물에게 생명을 주지만 소유하지는 않는다.
그는 행동한다. 그러나 취하지는 않는다.
그는 성취하나 아무런 명예도 바라지 않는다.
그의 명예가 더욱더 빛나는 것은
그가 아무런 명예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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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오쇼 라즈니쉬의 두드리지 마라 문은 열려있다 탐구
노자가 기원전에 살았던 인물인 만큼 도덕경은 매우 유구한 역사를 지닌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 속에는 도덕경이 촘촘하게 스며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라는 속담은 도덕경에서 나온 말이다. 홍콩 르와르의 제목이기도 한 ‘천장지구’라는 말도 도덕경에 있는 구절이고 ‘금옥만당’이란 말도 도덕경의 구절이다. 하다못해 유치원 꼬마도 “지는 게 이기는 거야!”라고 말한다.
이 말은 도덕경에서 말하는 상반된 것이 통합되어 나타나는 귀결을 의미이다. 하지만 도덕경은 모두 비유로 되어있어 그 해석이 너무나 다양하고 제각각이어서 접근하기 쉬우면서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도덕경은 하나인데 도덕경을 풀이한 책은 수도 없이 많고 계속해서 새로운 해석들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도덕경을 오쇼는 일찍이 그의 높은 혜안을 가지고 우리의 삶 속에 하나하나 풀어냈다. 그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누구보다도 쉽게 이야기하였다. 흔히 깨달은 사람으로 불려지고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인물로 뽑히기도 한 오쇼는 노자를 깨달은 사람으로 보았다. 그는 예수나 부처, 소크라테스 등을 깨달은 사람으로 보았고 그들에 대한 강의를 통해서 가르침을 전파하였다.
그중에서도 노자의 경우는 ‘자신이 곧 노자고 노자가 곧 자신이다’라고 말을 할 만큼 친밀함을 드러냈었다. 그는 강의에서 노자는 자신(오쇼)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도덕경의 내용을 철저히 옹호하기도 하였다. 삶은 반대편과의 긴장관계를 통해서, 반대편과의 만남을 통해서 존재한다. 만일 그대가 반대편을 부정한다면 그대는 완벽해질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이지는 못할 것이고 무엇인가를 빠트릴 것이다. 붓다가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는 무언가를 빠트리고 있다. 노자는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고, 그렇게 완벽하지도 않다. 그러나 전체적이다. -본문 중에서-
노자의 경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경전에 주의를 집중하라. [도덕경]에 대해서 명상하라. 그대의 존재가 이 [도덕경]으로 흠 뻑 젖도록 하라. -본문중에서-
오쇼가 도덕경을 옹호한 것은 삶은 살아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오쇼는 삶은 살아야 할 신비이지 풀거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살지 않은 삶을 어깨에 짊어지고 미루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한다. 오쇼가 바라보는 도덕경은 그런 오쇼의 관점이 잘 드러나는 책이다. 도덕경은 학문을 연구하고 지식을 탐구하는 책이 아닌 인간의 삶을 다룬 책이기 때문이다.
오쇼가 바라보는 노자는 철학을 하거나 제도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아이 같은 순수함의 근원으로 돌아가 거기에서 삶을 보는 사람이다. 따라서 도덕경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의 삶처럼 미묘하지만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다. 오쇼는 단지 우리가 왜곡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이 힘들거나 어렵다고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길을 돌아보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노자는 정반대가 통합되고 일치된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삶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단지 삶의 대변인일 뿐이다.
만일 삶이 불합리하다면 노자도 불합리하다. 만일 삶이 불합리한 논리를 갖고 있다면 노자도 삶에 대해서 불합리한 논리를 갖는다. 노자는 단지 삶을 반사할 뿐 거기에 아무 것도 덧붙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무엇이든 단지 받아들일 뿐이다. -본문 중에서-
오쇼가 책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80년 [마하무드라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석기현 스님과 홍신자 씨가 공동 번역한 책이 출간되면서이다. 그 책을 통해 오쇼에 흠뻑 빠져들게 된 이 책의 역자는 1983년 이 책 노자 도덕경을 필두로 오쇼 강의록 일곱 권을 책으로 번역 출간하였다. 시대적으로 암울했던 80년대에 이 책은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오쇼에 대한 출간이 봇물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저 : 오쇼 라즈니쉬 (Osho Bhagwan Shree Rajneesh,본명 : Rajneesh Chandra Mohan Jain)
오쇼의 가르침은 어떠한 틀로도 규정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의 강의는 삶의 의미를 묻는 개인적인 문제에서부터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시급한 정치ㆍ사회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주제를 망라한다. 오쇼의 책은 그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청중들에게 들려준 즉흥적인 강의들을 오디오와 비디오로 기록하여 책으로 펴낸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강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건 그 말은 지금 이 시대의 당신들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미래 세대를 위한 말이기도 하다.” 런던의 『선데이 타임스 Sunday Times』는 20세기를 빛낸 천 명의 위인들 중 한 사람으로 오쇼를 선정했으며, 미국의 작가 탐 로빈스(Tom Robbins)는 오쇼를 ‘예수 이후로 가장 위험한 인물’로 평하기도 했다.
인도의 『선데이 미드데이Sunday Mid-Day』는 인도의 운명을 바꾼 열 명의 인물을 선정했는데, 그중에는 간디, 네루, 붓다 등의 인물과 더불어 오쇼가 포함되어 있었다. 오쇼는 자신의 일에 대해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도록 기반을 닦는 것이라고 했으며, 이 새로운 인간을 ‘조르바 붓다(Zorba the Buddha)’로 부르곤 했다. 조르바 붓다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속 주인공인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세속의 즐거움을 누리는 동시에, 붓다와 같은 내면의 평화를 겸비한 존재를 일컫는다.
오쇼의 가르침에 일관되게 흐르는 정신은, 과거로부터 계승되어 온 시대를 초월한 지혜와 오늘날의 과학문명이 지닌 궁극적인 가능성을 한데 아울러 통합하는 것이다. 또한 오쇼는 점점 가속화되는 현대인들의 생활환경에 맞는 명상법을 도입하여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데 혁명적인 공헌을 했다. 그의 독창적인 ‘역동 명상법’들은 심신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줌으로써 일상생활 속에서 더 수월하게 평화와 고요함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
역자 : 김석환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전공하였다. 1980년도에 오쇼 책으로는 국내에 처음 소개된 [마하무드라의 노래]를 접하면서 오쇼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다. 이후 노자도덕경을 시작으로 예수, 헤라클레이토스, 피타고라스 등등 오쇼의 강의들을 다수 번역 출간하였다. 그의 번역은 국내의 암울했던 사회에 오쇼의 가르침을 확산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 후 20여 년의 공백기를 보낸 그는 오쇼 책 번역을 다시 시작하였고 [신비신학]을 번역 출간하였다. 현재는 ‘한국라즈니쉬번역연구회’ 카페를 개설하여 웹상에서 오쇼 번역본을 공유하고 있다.
〔제1장〕
꽃을 다치게 하면 벌을 다치게 한다
道可道, 非常道,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常隨。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말로 표현되는 道는 참다운 道가 아니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 때 추함이 생겨난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善을 善으로 알 때 惡이 생겨난다. 그런 까닭으로 有와 無는 서로 의지해서 생기며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의지해서 완전해지며 길고 짧음은 서로 의지해서 대조되며 높고 낮음은 서로 의지해서 위치하며 음과 소리는 서로 의지해서 조화를 이루며 앞과 뒤는 서로 의지해서 사귄다.
따라서 賢者는 행함이 없이 일을 처리하며 말이 없이 가르침을 행한다. 모든 것이 스스로 일어나지만 그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는 만물에게 생명을 주지만 소유하지는 않는다. 그는 행동한다. 그러나 취하지는 않는다. 그는 성취하나 아무런 명예도 바라지 않는다. 그의 명예가 더욱더 빛나는 것은 그가 아무런 명예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제2장〕
비유는 가슴에 있고 논리는 마음에 있다
道沖, 而用之, 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도는 텅 빈 그릇이라, 그것을 내어 쓰되 다함이 없으며, 가히 그 깊이를 측량할 길이 없다. 골짜기의 정령은 죽는 일이 없다. 이는 신비한 여성이라 불린다. 신비한 여성의 문은 하늘과 땅의 뿌리이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의지해라. 그대에게 편안함을 줄 것이다.
〔제3장〕
즐기는 것을 미루지 마라
持而盈之, 不如其已。 揣而銳之, 不可長保。 金玉滿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遺其咎。 功遂身退, 天之道。
활을 한껏 당긴다면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알맞은 순간에 멈추었다면 하고. 칼을 최대한으로 날카롭게 다스린다면 그 칼날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황금과 옥이 집안에 가득할 때 그대는 그것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없을 것이다. 부와 명예로 교만한 것은 스스로 몰락의 씨를 뿌리는 것이다. 그대의 일이 다 끝났을 때 물러나라. 그것이 하늘의 도이니라。
〔제4장〕
홀로 있어 행복하고 같이 있어 행복하다
三十輻共一瑴, 當其無, 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30개의 바퀴살이 바퀴통 하나에 함께하니 그 무로부터 바퀴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기어 그릇을 빚으니 그 무로부터 그릇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거두어내니 그 무로부터 집의 쓰임이 생긴다. 그러므로 유가 이롭게 되는 것은 무가 쓰이기 때문이다.
〔제5장〕
현명한 사람은 오직 한번 사랑에 빠지다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豫焉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兮其若容, 渙兮若氷之將釋, 敦兮其若樸, 曠兮其若谷, 混兮其若濁。 孰能濁以靜之, 徐淸, 孰能安以久動之, 徐生, 保此道者, 不欲盈。 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
옛날의 현자는 미묘한 지혜와 깊은 이해력이 있어 가히 깊이를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굳이 형용한다면 조심하는 모습은 마치 겨울 시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망설이는 모습은 마치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고 근엄한 모습은 마치 손님 같고 부드러운 모습은 마치 얼음이 풀리는 듯하고 진실한 모습은 마치 원목과 같고 열린 마음은 마치 골짜기 같고 혼탁함은 마치 흐린 물 같다.
이 탁한 세상에서 누가 휴식을 취할 수 있으리오? 조용히 있음으로써 맑아지나니 누가 그 고요함을 오래 지속할 수 있으리오? 행동함으로써 다시 삶으로 되돌아온다. 이 도를 보존하는 자는 가득히 채우려고 하지 않으니 가득히 채우지 않음으로써 버릴 것도 새로 만들 것도 다 넘어선다.
〔제6장〕
떨어지는 꽃잎은 아름답다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妄作凶。
수동성의 극치에 도달하여 정적의 근본을 굳게 지켜라. 만물이 형을 취하고 일어나 움직이지만 나는 그것들이 다시 안식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본다. 무성하게 자라나지만 다시 본래의 뿌리로 되돌아가는 식물처럼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안식이라. 곧 운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운명으로 돌아가는 것은 영원한 법칙을 찾기 위함이며 영원한 법칙을 아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영원한 법칙을 알지 못할 때는 재앙이 따를 뿐이다.
〔제7장〕
삶은 논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弊則新。 少則得。 多則惑。 是以聖人抱一, 爲天下式。 不自伐, 故有功。 不自矜, 故長。 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古之所謂曲則全者, 豈虛言哉。 誠全而歸之。
양보하면 온전하고 굽으면 곧게 되며. 패이면 채워지고 해지면 새로워지고 부족하면 얻게 되며 많으면 미혹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를 품어 천하의 모범이 된다.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으니 밝아지고 스스로를 옳다 하지 않으니 널리 알려지고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믿음을 주고 스스로를 뽐내지 않으니 사람들 가운데 으뜸이 된다. 이는 그가 다투지 않기 때문이며 따라서 천하가 능히 그와 다투지 않는다. 옛말에 이른바‘양보하면 온전하다’는 말이 어찌 헛말이겠는가 성인은 이로써 자신을 온전케 하고 천하가 그를 존경한다.
〔제8장〕
이제 기교를 버려라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故建言有之, 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纇, 上德若谷。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偸。 質眞若渝
上士가 도를 들으면 힘써 이를 행하고 中士가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하고 下士가 도를 들으면 이를 크게 비웃나니 하사가 비웃지 않는 도는 참된 도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이런 말이 전해온다. 도를 이해하는 자는 우둔한 듯하고 도에 다가가는 자는 뒤로 물러나는 듯하고 평탄한 도에 있는 자는 기복이 있는 듯하다. 최상의 덕은 골짜기처럼 빈 것 같고 순백은 때 묻은 것 같고 큰 덕은 부족한 것 같고 진실한 덕은 연약한 것 같고 질박하고 참된 것은 더러운 것 같다.
〔제9장〕
진정한 거지는 요구하지 않는다
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無有人無間。 吾是以知無爲之有益,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지극한 부드러움은 지극히 단단한 것을 통과하고 형체가 없는 것은 틈이 없어도 스며들어 간다. 나는 이로써 무위의 유익함을 안다. 말이 없는 가르침과 무위의 유익함을 그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가 없다.
〔제10장〕
삶은 강렬할 때만 의미가 있다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躁勝寒, 靜勝熱, 淸靜爲天下正。
가장 위대한 완성은 불완전한 것 같으나 그 쓰임은 다함이 없다. 가장 크게 충만한 것은 부족한 것 같으나 그 쓰임은 다함이 없다. 가장 뛰어난 기교는 서투른 것 같으며 가장 훌륭한 웅변은 더듬는 듯하다. 움직이면 추위를 이기고 고요히 있으면 열을 이긴다. 고요한 자는 우주의 규범이 된다.
〔제11장〕
앎은 존재의 변형이다
不出戶知天下, 不窺牖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 是以聖人, 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爲而成。
문밖에 나가지 않아도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며 창문으로 엿보지 않아도 하늘의 도를 알 수 있다. 지식을 추구하면 할수록 아는 것이 더 적어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더 추구하지 않아도 알며 보지 않아도 이해하고 하지 않아도 성취한다.
〔제12장〕
지식은 욕망이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取天下, 常以無事。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
지식을 추구하는 자는 날마다 더 배우려 하고 도를 추구하는 자는 날마다 더 잃으려 한다. 잃고 또 잃음으로써 무위에 이른다. 무위에 이르면 작위 하지 않건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세상을 취하는 자는 무위로써 하나니 어떤 것을 하기에 이르면 천하를 취할 수 없게 된다.
〔제13장〕
언어에 속지마라
知者不言, 言者不知。 寒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分。 和其光, 同其塵。 是謂玄同。 故不可得而親, 不可得而疏。 不可得而利, 不可得而害。 不可得而貴, 不可得而賤, 故爲天下貴。
아는 자는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며 그 날카로움을 꺾고 그 엉킴을 풀며 그 빛을 부드럽게 하고 그 혼란을 가라앉힌다. 이것이 신비한 통일이다. 그때 사랑과 증오가 그를 건들지 못하고 이익과 손실이 그에게 미치지 못하며 영예와 치욕이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리하여 천하에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된다.
〔제14장〕
미루지 않는 삶이 기도이다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 大小, 多少, 報怨以德。 圖難於其易, 爲大於其細。 天下難事, 必作於易, 天下大事, 必作於細。 是以聖人 終不爲大。 故能成其大。 夫輕諾必寡信, 多易必多難。 是以聖人猶難之。 故終無難矣。
無爲를 행하고 無事를 일삼고 無味를 맛본다. 작은 것을 크게 알고 적은 것을 많게 알고 원수는 덕으로써 갚으며 어려움은 쉬울 때 처리하고 큰 것은 적을 때 처리한다. 천하의 어려운 일은 쉬울 때 다루어져야 하고 천하의 큰 일은 작을 때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커다란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서도 큰 것을 성취한다. 가볍게 약속하는 자는 반드시 믿음이 적고 모든 것을 쉽게만 처리하려는 자는 반드시 어려움을 당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모든 것을 어렵게 여김으로써 결코 어려움을 만나지 않는다.
〔제15장〕
내일은 마음속의 상상이다
其安易持, 其未兆易謀。 其脆易泮, 其微易散。 爲之於未有, 治之於未亂。 合抱之木, 生於毫末, 九層之臺, 起於累土, 千里之行, 始於足下。 爲者敗之, 執者失之, 是以聖人無爲 故無敗。 無執 故無失。 民之從事, 常於幾成而敗之。 愼終如始, 則無敗事。 是以聖人欲不欲, 不貴難得之貨。 學不學, 復衆人之所過。 以輔萬物之自然, 而不敢爲。
안정된 것은 붙잡기 쉬우며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미리 도모하기 쉽다. 잘 부수어지는 것은 깨뜨리기 쉽고 미소한 것은 쉽게 흩어진다. 일은 나기 전에 처리하고 질서가 어지러워지기 전에 정리하라. 아름드리나무도 털끝 같은 씨앗에서 나오며 구 층 다락도 한 덩어리 흙 쌓기에서 시작하고 천 리 길도 한 걸음에서 시작된다.
억지로 하는 자는 실패하고 붙잡는 자는 놓친다. 그러나 성인은 無爲이므로 실패하지 않고 붙잡으려 하지 않으므로 놓치지 않는다. 사람이 하는 일은 항상 거의 이루어질 즈음에서 실패하니 끝날 무렵에 처음 시작하는 때와 같이 조심하면 실패하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욕심내지 않는 것을 성인은 욕심내고 얻기 어려운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세상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고 뭇사람들이 지나쳐버리는 것을 복귀시킨다. 이리하여 만물이 있는 그대로를 도와서 감히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다.
〔제16장〕
불행에는 이유가 있지만 행복에는 이유가 없다
天下皆謂我道大似不肖。 夫唯大, 故似不肖。 若肖, 久矣其細也。 夫我有三寶. 持而保之。 一日慈, 二日儉, 三日不敢爲天下先。 慈故能勇, 儉故能廣, 不敢爲天下先故能成器長。 今舍慈且勇, 舍儉且廣, 舍後且先, 死矣。 夫慈以戰則勝, 以守則固。 天將救之, 以慈衛之。
천하는 모두 나의 가르침은 어리석음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한다. 그것이 광대하기 때문에 그것은 어리석음과 상통하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어리석음과 상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래 전에 하찮은 것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나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 그것들을 지키고 안전하게 간직하라 첫째는 사랑이요 둘째는 결코 지나치지 않음이요 셋째는 결코 세상의 선두에 나서지 않음이다.
사랑을 통해 두려움을 갖지 않으며 지나치게 하지 않음으로 사람은 크게 힘을 비축하고 세상의 선두에 나서지 않음으로써 재능을 연마하고 성숙해질 수 있다. 만일 사랑과 태안함을 버리고 자제력을 버리고 뒤에 서는 것을 그만두고 선두로 나오면 그는 운이 다함이다.
〔제17장〕
삶은 문제가 아니다, 풀려고 하는 노력이 문제이다
吾言甚易知, 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 言有宗, 事有君。 夫唯無知, 是以不我知。 知我者希, 則我者貴。 是以聖人, 被褐懷玉。
나의 가르침은 매우 이해하기 쉽고 실천하기도 매우 쉽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도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 내 말에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 사람의 일에는 체계가 있다.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를 알지 못한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나는 뛰어나다. 그러므로 현자는 곁에 남루한 옷을 걸치지만 가슴속에 보석을 담고 있다.
〔제18장〕
겹겹이 쌓인 인격의 층들이 벗겨질 때
知不知上, 不知知病。 夫唯病病, 是以不病。 聖人不病, 以其病病, 是以不病。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가 최상이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는 자는 마음이 병들어있다. 마음의 병을 병이라고 인식하는 자는 병들어있지 않다. 성인은 마음이 병들어있지 않다. 마음의 병을 병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그는 마음이 병들어있지 않다.
〔제19장〕
삶이 곧 신이다, 삶이 그대를 이끌게 하라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故堅强者, 死之徒, 柔弱者, 生之徒。 是以兵强則不勝, 木强則兵。 强大處下, 柔弱處上。
사람이 태어날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을 때는 단단하고 굳어있다. 사물과 식물이 살아있을 때는 부드럽고 유연하지만 죽었을 때는 마르고 잘 부러진다. 그러므로 단단함과 굳음은 죽음의 친구이고 부드러움과 온화함은삶의 친구이다. 그런 까닭으로 군대가 강력하면 싸움에서 패할 것이다. 나무가 단단할 때 그것은 잘릴 것이다. 크고 강한 것은 하층에 속하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정점에 속한다.
〔제20장〕
신이 그대 안에서 숨을 쉰다
天下莫柔弱於水, 而功堅强者, 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弱之勝强, 柔之勝剛, 天下莫不知, 莫能行。 是以聖人云, 受國之垢, 是謂社稷主, 受國不祥, 是謂天下王。 正言若反。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은 없으나 단단한 것을 이기는 데에는 그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것에 대신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기는 것을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아무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자는 말한다. 세상의 중상을 자기 몸으로 떠안는 사람이야말로 나라의 보호자이고 세상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는 사람이야말로 천하의 왕이다. 올바른 말은 왜곡된 것처럼 보인다.
〔맺는말〕
노자 도덕경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누구의 말도 믿지 말라’ 본 책 저자인 오쇼(본명;Rajneesh Chandra Mohan Jain 1931년 인도에서 태어남)의 말도 오쇼의 말이기 때문에 믿으려 하지 말고 노자의 말도 노자의 말이기 때문에 믿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진리는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라는 표현도 사실은 썩 내키지 않는다. 알면 믿을 필요가 없다. 명상으로 가는 첫걸음은 내가 안다고 믿고 있는 지식을 하나씩 검증하는 일이다. 그것이 내가 알아낸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주입한 것인지 말이다.
또한 저자는 상황에 따라서 정반대의 말을 많이 하는데 지식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을 보고 모순이라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경의 첫 구절에서도 말하듯이 말은 도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도구가 아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말에 얽매이지 않는 지혜를 갖기 바란다.
나는 그저 이 책을 즐기라고만 말하고 싶다. 이 책을 읽고 그 난해하다는 노자 도덕경을 통달했다는 말을 하고 싶다면 차라리 책에서 손을 떼라고 말하고 싶다. 그저 오쇼가 하는 말과 글에 담긴 음률에 따라 춤을 추기를 바란다. 그러면 이해는 저절로 찾아오고 이완과 즐거움과 휴식이 저절로 찾아올 것이다. 終 (201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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