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길잡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믿는 인간에 대하여

by 해피맘훈주 2023. 9. 19.
반응형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세상의 온갖 악행과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는 현상을 보며 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냐고요. 왜 침묵하냐고요. 종교란 무엇일까요? 모든 종교의 근본원리는 인간의 구원이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역사를 보거나 현대에도 인간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탐욕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탐욕이 종교까지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능 때가 되면 항상 뉴스에서 보도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교회, 성당, 절에서 자신의 자식이 수능을 잘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을요. 이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입니다. 신이란 원래 모든 만물과 인간에게 공평한 존재가 아닌가요? 왜 자신의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사실 언밀히 말하면 들어준다면 그건 우리가 믿는 신은 아니지 않나요?

 

신이란 지구상에 존재하는 햇빛이며 공기이고 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존재에게 공평하게 있는 것입니다. 교회나 성당, 절에 가지 않아도 우리에겐 믿음이 있습니다. 아침이 되면 태양이 뜰 거라는 믿음, 우리가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기,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물이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서 의아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물입니다. 이제 물은 당연한 우리의 권리에서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돈을 주고 사서 마셔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다음은 공기가 될까요? 그다음은 태양이? 누가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나요?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의 탐욕은 어디까지 가야 멈출까요? 기후위기를 다룬 프로그램의 어떤 한 출연자분이 말했습니다. 짚신벌레가 병에 반이 차 있는데 아직도 반이 남아있다고 안심하는 순간 가득 차서 모두 자멸하고 만다고요. 소름이 돟았습니다.

 

인간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요? 대재앙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닌가요? 여기서 멈춰야 합니다. 하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최면에 걸린 사람들처럼 자신의 무덤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어떻게 멈춰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모두 한배를 타고 있는데 다들 뭔가에 무척 바쁩니다. 낭떠러지 폭포에 다가가고 있는데 배를 멈출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신께 기도하는 수밖에요.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요.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03726158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한동일의 믿는 인간에 대하여 탐구

왜 지금 ‘종교’와 ‘믿는 인간’을 이야기하는가 신을 믿은 인간의 역사가 말해주는 오늘

30만 독자에게 울림을 주었던 《라틴어 수업》의 저자 한동일 작가의 신작 《믿는 인간에 대하여》는 종교를 가진 한 명의 신앙인이자 오랜 시간 법학을 공부해 온 저자가 유럽의 역사 속에서 드러난 인간의 믿음과 종교에 대해 탐구하고 얻어낸 결과물이며, 불완전한 한 인간으로서 성찰하고 얻은 깨달음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인간의 유구한 역사에서 종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다. 법과 정치가 종교와 분리된 것은 불과 몇 세기에 지나지 않았고, 10세기 초반 유럽의 혼란한 시대적 상황에 불안에 떨던 민중은 교회로 몰려와 신의 보호와 자비를 청하기도 했다”라고 말하며, 역사 속 종교와 인간이 걸어온 흔적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고대 로마와 중세 시대는 비록 먼 과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늘날 인간 삶의 양식의 바탕이 된 큰 사건들이 많았던 시대였습니다. 종교, 정치, 경제, 생활 면에서 혼돈의 시대이자 지옥의 시간이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시대든 장점과 단점이 공존합니다. 어느 시대라고 특별히 거룩하거나 훌륭하지도 않습니다. (…) 역사는 똑같지는 않아도 조금씩 다르게 되풀이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참조할 만한 가장 좋은 예가 되어줍니다.” (97-98쪽)

 

저자는 특히 흑사병과 기근 등으로 고통의 시기를 겪었던 중세의 모습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오늘날을 비춰보며, 과거 인류가 중세를 거쳐 어떻게 오늘날에 이르렀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예를 들어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졌으나 그것을 계기로 의학이 어떻게 종교로부터 독립된 학문이 되었고, 역사 속에서 종교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정치로부터 분리될 수 있었는지, 그것이 사회적으로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를 살핀다.

 

또한 그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불거졌던 ‘종교의 자유’를 언급하며, 오늘날 팬데믹으로 인해 대면 종교 행사나 각종 집회가 금지되고 있는 중에 몇몇 종교 공동체가 내세운 ‘종교의 자유’는 과연 합당한가, 하는 문제를 법학자의 시선으로 짚어낸다. 로마 시대 의사의 특권과 책무를 살피며 오늘날에도 윤리적, 사회적 책무를 지닌 사람들이 추구하는 방향이 우리 삶에도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신이 있다면 신의 뜻은 ‘작은 것’에 있다 신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필요로 하는 것 이 책에는 저자가 그리스도교, 이슬람, 유대교의 성지가 모두 보여 있는 종교의 도시 예루살렘에서 한 달간 머물렀던 경험이 담겨 있기도 하다. 저자는 그곳에서 각자의 종교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분리장벽을 세우고 전쟁도 불사하는 인간의 모습을 마주하며 신의 존재와 신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고민한다.

 

“마태오복음 18장 10절을 보면, 청년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Ne contemnatis unum ex his pusillis).’ 우리말이나 라틴어 성경으로는 한 번에 감이 오지 않지만, 그리스어 성경을 보면 ‘보잘것없는(작은)’을 ‘미크론(μικρ?ν?)’이라고 씁니다. 영어 ‘마이크론(micron)’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예수의 말은 그처럼 보잘것없는 이조차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 작은 이’가 꼭 사람에게만 해당되지는 않을 겁니다. 자연계의 모든 ‘작은 것’을 함부로 업신여기는 인간의 마음이, 현재진행형의 시대적 암울함을 이어가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엄마를 만나고자 하는 어린 형제의 소원이 그렇게 큰 소원인지 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의 작은 바람 하나 이루어주지 못하는 정치 적, 종교적 신념에 얼마나 더 큰 신의 뜻이 있는 걸까요.

 

” 베드로 회개 성당으로 알려진 ‘닭 울음 성당’을 방문한 저자는 스승 예수를 배반한 베드로와 유다가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자결을 택한 이유에 대해 ‘실패’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를 생각하고, 구시가지에 위치한 ‘십자가의 길’ 초입에 새겨진 “오, 길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여, 나의 고통과 같은 아픔이 있다면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라는 문구를 되새기며 인간으로서 ‘같은 아픔’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고민한다.

 

이처럼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저자의 고민과 성찰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현대 사회를 비추고, 공존하기보다 개별적 삶을 우선하며 각박해져 가는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그 밖에도 모든 종교가 천국과 지옥을 말하지만 그 둘을 가르는 차이는 인간 존재의 태도에 있지 않은가,라는 물음이나, 인간의 고통은 신이 아닌 인간 사회가 만들어온 구조적인 문제에서 더 크게 비롯된다는 지적도 우리가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선형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인류의 역사 어김없이 다가올 내일을 위하여 “인류의 역사와 인간 사회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지만 아주 서서히 나선형 모양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인류의 진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더딘 걸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으며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145쪽)

 

저자는 이 책의 서문에 “오늘의 아픔과 절망을 바꿀 수 있는 내일이 있다면 인간은 그 아픔과 고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을 견디고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마치 기록적 폭염을 맞고 있다고 해도 곧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과 함께 청명한 가을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혹독하게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고 해도 봄은 어김없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그 시간을 버티고 견딜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라고 적어두었다.

 

이 같은 이야기로 문을 연《믿는 인간에 대하여》는 역사 속 종교와 신앙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 삶의 이야기이며,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에 따르면 과거 한국 사회는 경제발전을 위해 나머지 가치들은 무시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다양한 가치가 불균형적으로 성장하면서 대화와 타협의 가능성이 차단되었다. 현재는 그때로부터 벗어나 많은 것이 풍요로워졌지만 이 상처만큼은 치유되지 않은 채로 남았고, 그 결과 성별 간의 논쟁, 종교 간 마찰, 정치적 대립 등의 문제가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드러나고 있다.

 

저자는 이 모든 것이 ‘어느 한쪽이 오랫동안 강하게 억눌려왔고, 침묵을 강요당해 왔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지적하며, 지금과 같은 마찰은 양쪽 모두 자기 목소리를 강력하게 내고 있다는 의미이기에, 그 속에서 ‘변화의 씨앗’을 보며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이 책《믿는 인간에 대하여》는 종교와 신을 믿은 인간이 보여준 갈등과 변화의 역사를 돌아보며 그 같은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 : 한동일

2001년 로마 유학길에 올라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에서 2003년 교회법학 석사학위와 2004년 동대학원에서 교회법학 박사학위 모두를 최우등으로 취득했으며, 이후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Rota Romana) 변호사 자격을 얻은 뒤 이탈리아 법무법인에서 일했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서강대학교에서 라틴어 강의를 맡아 진행했고, 이어 연세대학교 법무대학원에서 ‘유럽법의 기원’과 ‘로마법 수업’을 강의했다. 현재는 번역 및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한동일의 공부법 수업』 『법으로 읽는 유럽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교회법률 용어사전』 등이 있다.


책 속으로

인류가 우리 선조들에 대해 간과한 것은 새로운 것을 찾아 기꺼이 이동하고자 했던 인류의 오래된 열망입니다. 오늘날의 속도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들도 요즘의 우리처럼 그 시대를 가로지르는 속도로 그렇게 새로운 곳,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 p.9
오늘날 우리 사회가 바라는 생각의 어른은 많이 공부하고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그가 공부하거나 소유한 것이 많고 적음을 떠나 진심으로 누군가의 곁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다 자랐거나 나이가 든 사람, 지위나 항렬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 있는 사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생각의 어른일 겁니다. --- p.7
사실 자신과 타인 사이에 선을 긋고 벽을 세우는 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나는 너와 다르다’라는 자의식 속에서 자아가 형성되고 발전하니까요. 하지만 나와 너는 다르다고 구분 짓는 경계 행위의 끝은 어디이며, 거기에서 무엇이 남을 수 있을까요? 양파도 겉껍질만 적당히 벗겨내고 요리해야지, 자꾸 벗겨내기만 하면 눈물만 날 뿐, 그 끝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너와 나의 차이를 말하기에 앞서 너와 내가 무엇이 같은지를 고민해야 하는 지점에 와 있습니다. 고민하고 돌아보며 다른 길을 찾아 나아갈 수 있는 것 또한 인간이 가진 힘입니다. --- p.38 
모든 것은 ‘바라봄(visio)’에서 시작됩니다. 개인의 고통도, 사회의 아픔과 괴로움도 그 해결을 위한 첫 단계는 ‘보는 것’에서 시작하지요. 여기가 모든 이해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국적, 성별, 나이, 종교를 비롯해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인간이기에 분명히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바라봐야 하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같음’입니다. --- p.41 
아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고통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찌 보면 인간은 각자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이 있다는 점에서 평등한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그렇게 아파하고 신음하고, 때로는 자신의 실패와 마주함으로써 성장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미래 세대에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 안락한 삶을 사는 법만 강요할 뿐, 실패할 기회를 주지 않고 다시 일어설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 p.62 
종종 많은 이들이 자기가 어쩔 수 없는 것에 휘둘려 힘겨워하곤 합니다. 가정, 학교, 회사와 같은 조직 안에서나 사람들 사이에서나 내가 풀 수 없는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잘 살펴 분별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새벽을 깨우는 기도 소리를 멈출 수 없는 것처럼 할 수 없는 일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 p.76 
신에게 드리는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에게 많은 것을 원하고 바라면서 기도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미래를 희망하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정확히 방향을 모르면 올바른 기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타인에게 무언가를 갈구하기 전에 자신이 무엇을 희망하는지, 그 희망의 방향성이 맞는지, 그것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거기에서 나아가 신에게 무엇을 어떻게 청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묻고 성찰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 p.95
 “수도복이 수도승을 만들지 않는다(L’abito non fa il monaco).” 수도복을 입었다고 해서 모두 수도자나 성직자가 되지 않는 것처럼 ‘옷 자체가 그 옷이 지향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을 따르는 인간은 그 믿음으로 예배하고 경배할 공간을 더 화려하고 웅장하게 만들어나갔지만, 그 안에 머무는 인간은 그 예배의 공간만큼 대단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았나 봅니다. 그 때문에 ‘수도복이 수도승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관용어가 생겨난 게 아니었을까요? --- p.119 
종교의 자유는 궁극적으로는 ‘신앙의 자유’와 ‘신앙실현의 자유’, 둘로 나뉩니다. 신앙의 자유는 ‘절대적인 자유’로서 신앙을 선택하거나 바꾸거나 포기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고, 이에 더해 신앙을 갖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합니다. 반면 신앙실현의 자유는 ‘상대적인 자유’로서 종교 의식, 종교 선전, 종교 교육, 종교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말합니다. 다만 종교의 상대적인 자유는 다른 사람의 기본권이나 사회 공동체 질서를 해치지 않는, 조화로운 범위 안에서만 인정됩니다. --- p.129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다룬 유럽의 헌법학 서적에서도 감염병의 상황에서는 국가권력에 의해 종교 행사를 일시적으로 금지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는 감염병이 위중하게 유행하는 상황에서 행정당국이 일시적으로 예배를 금지해도 사람들이 별다른 불만을 갖거나 소동이 우리에 비해 그리 크지 않습니다. ‘상대적 자유’인 종교 행사를 일시적으로 불가피하게 제한하는 것은, 본질적이고 절대적 자유인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 p.132 
4세기에 이르러서는 공공 의료기관이 설립됩니다. 황제는 황실 병원의 의료원장을 임명해 모든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무상으로 돌보게 했어요. 요즘 표현대로 ‘취약 계층의 의료 사각지대’를 돌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픈 사람이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을 수 없다면 그것을 국가가 해주어야 한다는 개념이 있었던 겁니다. --- p.205 
우리 삶도 가만히 생각하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사막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럴수록 사람들이 세워놓은, 시시각각 변하는 이정표만 보고 따라 걷는 건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사막에서 변치 않는 별자리를 보며 걷는 것처럼 우리도 변치 않는 진리, 변치 않는 빛을 보며 걸어가야 합니다. 또한 거기에서 나아가 우리 스스로가 별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별을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남이 보고 따라올 수 있는 별이 되면 좋지 않을까요? --- p.213~214 
신이 인간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할 뿐입니다. 인간사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고 우리는 그 괴로움을 줄이고자 삶의 대소사부터 존재론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두고 기도로 청합니다. 기도를 통해 마음의 고통을 줄일 수는 있지만,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부족해서 고통받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 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이고, 신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필요로 하는 신을, 인간의 욕망에 따라 옹졸하고 속 좁은 또 다른 ‘인간’처럼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 p.239~240 
인간의 삶은 계속 이어질 테고, 오늘은 내일의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혼란이 일단락된 결과물뿐만 아니라 그 과정 모두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인류의 모든 순간이 기쁨과 환희의 역사는 아닐 테지만, 남겨 놓은 그 기록들이 분명히 새로운 미래를 위한 좋은 근간이 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 p.265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