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우주에서 지구라는 우주선을 함께 타고 있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우리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 더 암담하기만 합니다. 우리의 역사가 우리의 미래를 말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전쟁의 진짜 원인이 지능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일군 우리의 경제발전도 우리의 지능 덕택입니다.
경제발전으로 따라온 기후위기 또한 인간의 지능의 산물입니다. 여기서 생각해 봅니다. 인간은 뛰어난 지능으로 모두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과학자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인간의 탐욕으로 얼룩진 잔학함은 우리를 파멸로 인도하는 듯합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인류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희망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희망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희망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까 두렵습니다. 이 대자연의 어머니는 우리를 어디까지 품고 기다려 줄까요?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애를 달래듯 우리에게 경고를 줍니다.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라고요. 언제까지 우리가 이 지구의 주인인양 버릇없이 굴었다가는 우리의 미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달라져야 합니다. 지금의 시스템으로는 지속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러나 대자연의 어머니는 자신이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지만 아이를 품에서 놓지 않습니다. 아이인 우리는 언젠가는 싸늘하게 식어있는 어머니의 시신속에서 우리도 함께 죽게 될지도 모르는 운명이라는 것을 뛰어난 지능으로 알고 있지만 어린아이인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광활한 우주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별이 지구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우리가 우주에 나갈 수 있는 길도 아직은 요원합니다. 우리에겐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기후위기를 이겨내고 인간의 역사를 계속 써내려갈 방안을 모색할 시간이 절실합니다. 이 땅에서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으로는 우리를 살릴 수 없습니다. https://www.yes24.com/Product/Goods/70364527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게르하르트 슈타군의 전쟁과 평화의 역사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 탐구
지도자의 선동, 젊은이들의 영웅 심리, 인간의 탐욕이 만든 폭력의 역사, 십자군 전쟁
교황이 전쟁을 부르짖었다. 동양의 이교도를 응징하고 그리스도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칼을 높이 쳐들라고 외쳤다. 종교적 열망에 사로잡힌 영주들과 기사들, 상공인, 농민뿐만 아니라 소년들까지 대열에 합류했다. 사제들은 그들의 무기에 성수를 뿌리며 축복했고,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즉시 천국에 들 것이라고 선동했다. 한때 역사가들은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벌인 가톨릭 세력의 이 십자군 전쟁을 성전(聖戰)이라 평가했다.
신의 뜻을 받든 고귀하고도 성스러운 전쟁으로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은 시작부터 세속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 장자 상속의 전통에 따라 부모의 영지를 물려받지 못한 귀족 자제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었고, 기사 계급은 그들대로 따분한 일상에 지쳐 있었다. 그러던 차에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하여 동방 정교회를 세운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이슬람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다.
로마의 교황은 유럽 귀족의 자제들과 기사들의 불만을 일거에 해소하고 동방 정교회를 흡수할 목적으로 성전을 부르짖었다. 십자군이 지나간 지역은 약탈과 방화, 살인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예수를 죽인 족속’인 유럽의 유대인이 가장 먼저 공격 대상이 되었다.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이는 극소수였다. 유대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던 귀족들과 전쟁에서 한몫 잡아 보려는 모리배들이 다수였다.
전쟁이 지지부진하자 십자군은 칼끝을 돌려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했다. 기독교 문명의 찬란한 도시 콘스탄티노플은 같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중세 시대에 일어난 전쟁은 대부분 ‘종교’가 이유였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종교 전쟁이 성전이었던 적은 없었다. 종교 개혁 100년 뒤에 일어난 30년 전쟁도 표면적으로는 구교와 신교의 갈등이 빚은 종교 전쟁의 성격을 띠었지만, 결국에는 국가 간의 이권과 권력 지형에 따라 신교 국가와 구교 국가가 동맹을 맺기도 하면서 전개되었다. 사랑과 평화를 가르치는 종교가 분쟁의 씨앗이 되는 아이러니는 오늘날까지도 되풀이되고 있다.
전쟁은 인간의 본성인가?
이 책 『전쟁과 평화의 역사,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가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왜 전쟁을 할까?’ 이 의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저자는 먼저 자연 세계를 들여다본다. 만약 자연계에서도 전쟁 행위가 나타난다면 호전성은 신이 부여한 인간의 본성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연은 전쟁을 하지 않는다. 먹고 먹히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살육은 먹이사슬에 따른 것이다.
호랑이가 사슴을 잡아먹는 장면은 잔인하게 다가오지만, 어미와 함께 먹이를 먹는 새끼 호랑이를 보면서 같은 감정을 느끼지는 않는다. 포만감을 느끼는 맹수는 초식동물이 눈앞에서 뛰놀아도 덮치지 않는다. 공포를 조장하거나 상대 세력을 멸족시킬 목적으로 폭력을 행하지도 않는다. 예외는 있다. 동물행동학자 제인 구달은 침팬지 무리 사이에서 일어난 섬멸전(적을 남김없이 죽이는 전쟁)을 보고했고, 생물학자 수잔 페리는 꼬리 감는 원숭이 무리에서 일종의 게릴라전이 벌어져 결국 한 무리가 상대 무리를 완전히 멸절시켰다고 발표했다.
자연계에서 일어난 전쟁 행위를 통해 한 가지를 유추할 수 있다. 육식을 하고 지능이 뛰어난 종이 전쟁을 한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인간은 강인한 근육이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갖지 못했기에 무기를 발달시켰고, 덩달아 살상 기술 역시 발전시켰다. 전쟁의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진화론과 사회 진화론 그리고 식민지 전쟁
전쟁을 옹호하는 무리는 학문적 성과를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구실로 삼기도 했다. 다윈의 진화론과 월리스의 적자생존 이론은 강대국과 스스로 뛰어나다고 믿는 민족이 다른 나라와 민족을 정복하는 훌륭한 이유가 되었다. 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사라진다는 진화론의 일부 학설을 인간 세계에 적용한 것이다. 이를 ‘사회 진화론’이라고 한다. 여기에 유럽의 전통적인 기사도 정신이 한몫을 한다.
기사도 정신은 같은 기사 계급끼리는 예를 다해 싸우지만 자신들보다 아래에 있는 신분에게는 무자비한 속성을 보인다. 유럽의 문명국가들은 자기네들끼리는 사전에 맺은 협정에 따라 전쟁의 예를 지켰지만, 하등 한 존재로 분류한 민족들에 대해서는 잔인한 방식으로 정복했다. 근대에 열강들이 식민지 전쟁을 일으키면서 보인 잔혹성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동맹 시스템과 대중의 광기로 인한 두 번의 세계 대전
1900년대 초 유럽은 전통적 견원지간인 영국-프랑스-독일이 형성한 정치 지형에 이탈리아와 러시아가 가세하면서 각 국가들이 힘의 균형에 따라 뭉치고 흩어지는 모양새를 띠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암살되는 사건이 터지자, 각 나라는 동맹 시스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먹고사는 문제와 한 사람의 야욕이 결합되었을 때 대중의 지성이 완전히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엄청난 배상금을 문 독일은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공황으로 최악의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이때 독일 제국의 부활을 부르짖으며 대중을 선동한 히틀러에 의해 독일은 다시금 군국주의의 길을 걸었고, 또 다시 세계 대전의 원흉이 되고 만다. 살상력을 극대화한 무기들로 치른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이 세상에 생지옥을 옮겨 놓았다. 전쟁의 ‘낭만’에 도취된 채 영웅을 꿈꾸며 전장으로 향했던 젊은이들은 동료들의 살점이 흩어져 있는 참호 속에서 밥을 먹어야 했다.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전쟁이 불러올 최종 결말의 예고편이었다.
우리는 평화의 역사를 쓸 수 있을까?
전쟁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잔혹성은 시간이 지나도 희석되지 않았다. 지성은 평화를 요구하지만, 또한 전쟁 기술을 날카롭게 벼르는 도구가 되었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먼 나라의 국민에게는 적대감이 없다. 하지만 늘 얼굴을 맞대고 살아온 이웃이 적으로 돌변하면, 나중에 보복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죽여야 한다.
이것이 내전이고, 한국 전쟁의 모습이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종교를 내세운 성전을 구실로 테러가 일어난다.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내전이 잦은 이유는 다이아몬드, 석유를 비롯한 희귀성 지하자원이 그 땅에서 생산된다는 사실과 직접적 관련이 있다. 최빈국의 ‘영주’ 들을 이용한 산업 국가들의 후원 속에 기업들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쟁은 산업이 되었다. 이런 탐욕 속에서 과연 우리는 평화를 만들 수 있을까? 전쟁의 역사를 끊고 평화의 역사를 만들 수 있을까? 이 책은 말한다.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고. 그렇기에 더더욱 이 책 속에 담긴 비극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전쟁의 참상을 배우는 것, 그것이 평화에 대한 공부다.
저 : 게르하르트 슈타군 (Gerhard Staguhn)
1952년 독일에서 태어나 독문학과 종교학을 공부했다. 저명한 저널리스트로서 독일의 주요 일간지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자연 과학과 인문학 등 지식 세계 전 분야에 정통한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으로도 유명하다. 각종 도서상과 작가상을 수상했으며, 그의 저서들은 유럽 15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의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다. 대표 저서로 『종교,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 『왜?? 생각을 키우는 세상의 모든 질문』, 『생명의 설계도를 찾아서』, 『유혹하는 우주』, 『알수록 재미있는 날씨 이야기』 등이 있다.
역 : 장혜경
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독일 학술교류처 장학생으로 하노버에서 공부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설득의 법칙 』, 『가까운 사람이 경계성 성격 장애일 때』, 『오노 요코』,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 『나는 이제 참지 않고 말하기로 했다』, 『변신』, 『사물의 심리학』, 『나무 수업』,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등 많은 도서를 우리말로 옮겼다.
책 속으로
인류는 지구라는 우주선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에 승객들은 서로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 우주의 심연 곳곳에는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우주는 사실 생명에 극도로 적대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우주선을 생명에 적대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_「들어가는 글 : 왜 전쟁은 끊이지 않는가?」, 5페이지 |
인간은 사냥을 했고, 짐승을 죽여 고기를 먹었다. 거꾸로 인간을 먹잇감으로 여기는 위험한 동물들도 있었다. 이 동물들과 싸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인간은 무기를 개발했다. 그중에는 투석기, 투창, 활과 화살, 취통(입으로 불어서 쏘는 화살) 등 먼 거리에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무기가 많았다.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속도가 아주 느렸기 때문이다. 맹수들과 비교하면 인간은 긴 이빨이나 날카로운 발톱 같은 자연의 ‘무기’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큰 뇌를 만들어 낸 뛰어난 지능 덕분에 그런 생물학적 단점을 극복할 수 있었다. _「인간은 폭력을 좋아하는 걸까?」, 16페이지 |
침팬지와 꼬리감는원숭이의 사례를 통해 인간의 폭력성에 생물학적 뿌리가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지구상에서 지능이 가장 높은 생명체, 즉 침팬지와 인간이 체계적으로 동족을 섬멸하기 위한 행위를 한다는 사실은 의아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결국 따지고 보면 전쟁의 진짜 원인은 ‘지능’이라고 할 수 있다. _「인간은 폭력을 좋아하는 걸까?」, 22페이지 |
전쟁으로 인해 한 민족이나 국가가 멸망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신생국이 탄생한 경우도 있다. 모든 건국의 시초에는 폭력이 있었고 모든 국가는 폭력 위에 건립되었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진리다. 또 모든 국가는 전쟁이라는 폭력이 오로지 국가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확연히 보여 준다. 민주 국가라고 해서 결코 예외가 아니다. 어떤 국가를 살펴보건 국가는 전쟁을 모태로 탄생하고 발전했다. _「인간은 폭력을 좋아하는 걸까?」, 31페이지 |
운동 경기에서 볼 수 있는 놀이와 겨루기의 밀접한 결합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목표는 이기는 것, 첫째가 되는 것, 첫째가 되어 숭배를 받는 것이다. 운동선수에게 수여하는 메달은 용감한 군인들에게 주어지던 훈장과 유사하다. 전쟁에서도 겨루기에서도 명예와 덕목, 용기와 명성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때문에 중세의 젊은 귀족 전사들은 쉬지 않고 스스로를 단련했고 덕을 쌓았다. 그것은 신분이 높은 자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쉼 없는 투쟁이었다. 그랬기에 중세 기사 계급은 놀이도 전투도 전쟁도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다. _「놀이와 예술로서의 전쟁」, 50페이지 |
과거의 전쟁 문학은 전쟁을 신의 자연력으로, 신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자연재앙처럼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인간에게 밀어닥치는 사건으로 찬양했다. 전쟁은 어쩔 수 없이 닥쳐오는 고난이기에 이를 이겨 낸 인간은 고귀하다. _「놀이와 예술로서의 전쟁」, 63페이지 |
전쟁이 건축술과 도시 건설에 미친 영향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늘 적의 침공을 염두에 두어야 했기에 방어력이 뛰어난 집과 도시를, 다시 말해 시민들이 적의 급습을 받더라도 즉각 응수할 수 있도록 건설했다. 장소를 물색하는 단계에서부터 천혜 조건을 따졌다. 그래서 가파른 언덕을 선호했다. 그 언덕이 강을 끼고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언덕 아래를 굽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적어도 한 면은 강이 막고 있어서 침공당할 걱정이 없었다. 탁 트인 평지는 피했다. _「놀이와 예술로서의 전쟁」, 69페이지 |
따라서 인류 역사의 거의 모든 전쟁은 성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종교의 사제들은 전사들의 무기에 축복을 내려 주었고, 지금까지도 이러한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신을 따르지 않았던 나치도 똑같은 짓을 했다. ‘신이 우리와 함께하도다.’ 나치군의 버클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신이 자기편이라고 믿는 군인들이 자신의 행동-자신의 범죄-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_「왜 교황은 전쟁을 부르짖었는가?」, 80페이지 |
열강의 식민 정책은 형태만 바뀌었을 뿐 하수인을 이용하여 여전히 음모를 꾸미고 있다. 온갖 잔꾀를 써서 과거의 식민지에 말 잘 듣는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고 이들을 지원하여 지하자원이 가득한 이들 지역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이다. 은폐된 식민 정책이라 할 수 있다. _「왜 아프리카 사람들은 가난할까?」, 180페이지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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