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자입니다. 그의 철학적 고민과 문학 작품은 그의 젊은 시절 독일에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강의를 듣고 현상학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현대"라는 잡지를 창간하며 실존주의자로서 세계적인 지도자로 부상했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탐구
사르트르는 문학과 사상을 통해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지며 자신의 정치적 참여를 하면서도 스스로의 실천을 이루어냈습니다. 그의 소설 "구토"와 희곡 "악마와 신", 논문 "존재와 무"와 "변증법적 이성비판" 등은 세계 문학과 철학사상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작품으로 남았습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본질과 존재에 대한 문제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하이데거의 물음을 계승하면서도, 하이데거를 극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다재다능한 사르트르는 존재론을 통해 우리의 현실과 문제를 탐구하며 자기기만, 수치, 욕망, 무관심, 유혹, 연애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는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고자 하며, 우리에게 존재에 대한 의문을 던져주었습니다.
사르트르의 중요한 저작 중 하나인 "존재와 무"는 무엇일까요? 이 작품은 '물체와 의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존재의 탐구'라는 서론을 가지고 있는데, 이로써 그가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서론에서 사르트르는 현상이 본질을 숨기지 않고 보여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사물의 본질은 그 뒤에 숨겨져 있다는 관점을 부정하며, 사물은 그 자체로 있을 뿐이며 아무런 의식이나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반해 인간은 '대자존재'라고 설명했습니다. '대자'는 의식을 의미하며, 인간은 의식과 함께 있는 존재라고 봤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언제나 무언가에 대해 의식하고 있는데, 이는 의식하는 것과 의식되는 것 사이에 끊임없이 간극을 만든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인간은 자기에 대한 의식을 가지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과 존재에 대한 고민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사르트르는 또한 인간의 자유에 관한 고찰도 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의식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자유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자유는 인간의 본질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동시에 책임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유를 통해 상황을 선택하고 책임을 질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요약하자면, 사르트르는 인간의 본질과 자유, 의식과 존재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인간의 삶과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물음을 던지는 철학자입니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며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저자(글) 장 폴 사르트르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작가이며 실존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1905년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두 살 때 해군 장교인 아버지를 여의고 슈바이처 가문의 홀어머니와 외조부 밑에서 자라났다. 후일 사르트르는 자서전에서, 선천적 근시와 사시(斜視) 그리고 외갓집의 낯섦 등으로 이 시절에 겪은 심리적 부담에 대해 밝히고 있다.
에콜 노르말(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 심리학, 사회학을 공부하며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시몬 드 보부아르를 만나고, 레몽 아롱과 메를로 퐁티를 사귀게 된다. 1929년에는 교수자격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한 후 교직에 몸담았다. 1932년에 베를린 프랑스 문화원의 강사로 있던 레몽 아롱으로부터 처음으로 후설의 현상학에 관해 듣고 이듬해 베를린에서 잠시 독일 철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 현상학을 접목한 실존철학에 몰두하면서 1938년에 첫 소설 <구토>를 출판함으로써 문학계에 널리 알려진다. 1943년에는 <존재와 무>를 내놓아 철학자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동시에 징집되었다가 한때 포로생활을 했으며 레지스탕스 운동에도 참여했다. 전후 메를로퐁티와 '사회주의 자유'라는 이름의 저항단체를 조직하고 '앙가주망(참여)'의 사상가로 변모했으며 실존주의의 범람과 더불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1945년 <현대>를 창간하고 이를 통해 알제리해방전선을 지원했으며, 베트남 전법 국제재판에 참가하는 등 비공산당계의 좌익을 대표해 당대의 모든 정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소설로는 단편집 <벽>과 다섯 권으로 된 미완의 장편 <자유의 길> 연작이 있으며, <파리떼>, <닫힌 방>, <더러운 손>, <악마와 선신>, <알토 나의 유폐자들> 등의 희곡작품으로 작가의 명성을 견고히 했다.
철학서로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과 유고작 <도덕을 위한 노트>가 있으며, 비평서로 <보들레르>, <성자 주네>, <집안의 천치>, <말라르메>가 있다. 1964년 자서전 <말>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했다. 이후 저술 활동을 계속해 1971년 플로베르 평전 <집안의 천치> 1,2권을 출판하였으나 1973년 갑작스럽게 눈이 실명되어 문학 저술을 중단했고, 1980년 사망하여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책 속으로
인간이 자기의 자유를 의식하는 것은 불안에 있어서이다. 또 말하자면, 불안은 존재의식으로서의 자유의 존재방식이다. 불안 속에서야말로 자유는 그 존재 속에 그 자신을 위한 문제가 된다. |
두려움은 세계의 존재들에 관한 두려움이고, 불안은 자기 앞에서의 불안이다. 현기증이 불안인 것은, 내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절벽에서 몸을 던지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은 그것이 밖에서 나의 생명과 나의 존재를 변경할 우려가 있는 한, 두려움을 일으키지만, 내가 이 상황에 대한 나 자신의 반응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한, 이 상황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공격에 앞선 준비 사격은 포격을 받는 병사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 불안이 시작되는 것은 그가 포격에 대항하여 취해야 하는 행동을 예상하려고 할 때이며, 그가 이 포격에 ‘버티어 낼’ 수 있을 것인지 자문해 볼 때이다. 마찬가지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기 부대를 찾아가는 징집된 군인은 어떤 경우에는 죽음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기 자신 앞에서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
나는 조약돌 위에서 미끄러져 절벽 아래의 심연 속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오솔길의 무른 흙이 발밑에서 무너질지도 모른다. 이렇게 다양한 예상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 하나의 사물로서 주어진다. 나는 그런 가능성에 대해 수동적이다. 나 또한 만유인력에 끌리고 있는 이 세계의 하나의 사물인 한, 그 가능성들은 밖에서 나에게 온다. 이것은 ‘나의’ 가능성은 아니다. 이 순간에 ‘두려움’이 나타난다. 두려움은 상황에서 출발하여 나 자신에 관해 파악된다. |
소설가와 시인들이 강조한 것은 본질적으로 시간의 이 분리적 효력에 관한 것이었으며, 아울러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적 동태에 속하는 비슷비슷한 관념, 즉 ‘모든 “지금”은 곧 “지난날”이 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관념에 대한 것이다. 시간은 갉아먹고 구멍을 뚫는다. 시간은 분리한다. 시간은 달아난다. 또 시간은 분리하는 자로서, 인간을 그의 괴로움에서 또는 괴로움의 대상에서 분리함으로써 치유해 준다. |
세계는 인간적이다. 우리는 의식이 차지하고 있는 매우 특수한 위치를 안다. 존재는 나를 거역하며 내 주위 곳곳에 있다. 존재는 내 위로 무겁게 덮쳐 온다. 존재는 나를 에워싼다. 나는 끊임없이 존재에서 존재로 지향된다. 거기 있는 이 탁자는 존재이고,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 바위, 이 나무, 이 경치는 존재이며, 그 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이런 존재를 파악하기를 원하면서도 이제 ‘나’밖에 발견하지 못한다. |
인간존재에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에-있는(?tre?l?)’ 일이다. 다시 말하면 ‘거기 그 의자 위에’ 존재하는 일이고, ‘거기 그 탁자 앞에’ 존재하는 일이며, ‘거기에, 이 산꼭대기에, 이러이러한 크기로, 이러이러한 방향 따위로’ 존재하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의 존재론적인 필연성이다. |
그 밖에도 타인들과 나의 직업적이고 기술적인 관계들이, 나를 또한 ‘누구든 상관없는 누구’로서 알려 준다. 카페 종업원에게는 나는 손님이고, 개찰원에게는 나는 지하철 이용자이다. 끝으로 내가 앉아 있는 카페의 테라스 앞 거리에서 갑자기 일어난 사소한 사건 또한, 나를 이름 없는 목격자로서, 또 ‘이 사건을 하나의 외부로서 “존재하게 하는” 시선’으로서 지시한다. 내가 구경하고 있는 연극, 또는 내가 참관하고 있는 미술전람회가 지시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이름 없는 관객이다. 또 분명히 내가 구두를 신어 볼 때, 내가 병마개를 딸 때, 내가 엘리베이터를 탈 때, 내가 극장에서 웃을 때, 나는 나를 ‘누구든 상관없는 누구’로 만든다. |
그들의 불행은 그들에게 ‘습관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자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불행은 “존재한다.” 불행은 노동자의 조건을 구성하고 있다.’ 그들의 불행은 부각되어 있지 않다. 그들의 불행은 밝은 빛 속에 드러나 있지 않다. 따라서 그들의 불행은 노동자들에 의해 그 존재 속에 통합되어 있다. 노동자들은 괴로워하지만, 그 괴로움에 주의를 집중하지도 않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는 ‘괴로워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같은 일인 것이다. |
우리의 존재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선택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대한 자’로서 선택할 것인지, ‘고귀한 자’로서 선택할 것인지 또는 ‘비열한 자’, ‘비굴한 자’로서 선택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
인간은 이미 인간적인 것밖에 만날 수가 없다. 더 이상 인생의 ‘저 너머’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하나의 인간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인생의 최종 현상이기는 하지만 또한 인생이다. 이런 것으로서 죽음은 거꾸로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인생은 인생에 의해 한계가 정해진다. 인생은 아인슈타인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유한하기는 하지만, 한계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된다. 죽음은 종결화음이 멜로디의 의미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의미가 된다. 거기에는 기적적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죽음은 해당 계열의 하나의 항(項)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어떤 계열의 각각의 항은 그 계열의 모든 항에 대해 언제나 앞서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렇게 회복된 죽음은 단순히 인간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죽음은 ‘나의 것’이 된다. 내면화됨으로써 죽음은 개별화된다. 그것은 이미 인간적인 것에 한계를 지니도록 하는, 위대한 불가지(不可知)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개인적인 인생 현상이며, 이 현상이 이 인생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뿐인 인생, 즉 두 번 다시 되풀이할 수 없는 인생, 결코 다시 새로 수정할 수 없는 인생으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인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나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는 자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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